번역 상태: 권1 AI 초벌 번역 완료 · 교감/인문학 검수 전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공공데이터의 《농산집》과 공개 원문을 대조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시어·전고·인명 표기는 후속 교감에서 수정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현대어는 운율을 재현한 번역시가 아니라 의미 전달을 우선한 산문형 초벌 번역입니다.
- 공공데이터: 한국고전번역원_한국문집총간_농산집_20211213
- 저자: 농산 신득구(申得求, 1850~1900)
- 권1 체재: 시(詩)
- 대조 공개 원문: 위키문헌 《農山先生文集 (申得求)/卷一》
1. 偶吟 — 우연히 읊다
아직 한 가지 재주도 이루지 못한 채 스무 번의 봄을 지냈다. 오늘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니, 참된 도를 듣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2. 庚午除夜 — 경오년 섣달그믐
스물두 해를 맞아 스스로를 돌아보니 생각이 깊어진다. 둔한 자질은 바로잡기 어렵고 달리는 세월은 붙들어 둘 수 없다. 공부는 하나로 꿰뚫는 데 힘써야 하고, 이치는 만 가지로 달라지는 사물 속에서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힘쓸지어다, 헛되이 노닐지 말라.
3. 慕古堂詠懷 — 모고당에서 회포를 읊다
나는 재주가 없어 세상과 능숙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세상도 나도 서로 잊고 지냈지만, 다행히 책 속의 옛사람들은 못나고 졸렬한 나를 버리지 않아 날마다 가까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사람을 벗 삼는 뜻을 취해 거처를 ‘모고(慕古)’라 이름하였다.
바닷가에 사는 이 ‘옛것을 사모하는 사람’은 남이 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타고난 바탕은 둔하고 세속의 가락에는 맞지 않는다. 스물한 살이 되어 호남의 고개를 넘어 스승을 찾았고, 덕망 높은 고산의 노선생에게서 옛 성현의 학문을 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격려하여 요·순의 공경, 공·맹의 인의를 본받고자 했다. 학문은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밖에서 명예를 구해서는 아무 이익이 없다. 널리 배우되 요점을 잃지 말고, 사물과 나 사이에 막힘 없이 이치를 궁구하며, 앎과 실천을 모두 ‘경(敬)’으로 지탱해야 기질을 바꿀 수 있다. 공부는 때를 놓치지 않되 조급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아야 한다. 천 년 전 성현도 책을 펼치면 바로 오늘 만나는 사람과 같으니, 뜻을 함께하는 벗들에게 힘써 쉬지 말라고 당부한다.
4. 追次皷山老先生壽席韻 — 고산 노선생 수연의 운을 뒤늦게 차운하다
천지의 빼어난 기운이 오랜 세월 모여 신미년에 우리 선생을 낳았다. 이제 예순을 맞으셨는데, 이날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덕과 학업이 함께 높으니 어진 사람은 반드시 장수하리라. 남극성의 빛을 빌려 끝없는 세월까지 비추시기를 바란다.
5. 敬次老先生讀大學韻 — 노선생의 「대학을 읽다」 시에 삼가 차운하다
성현의 문호가 얼마나 깊은지 아직 엿보지도 못한 채 스무 해가 뱀처럼 달려가 버렸다. 전해 받은 《대학》 한 권을 스승께서 자로 재듯 가르쳐 주셨으니, 내 힘을 다해 평생 공부하고자 한다.
6. 拜次蒼碧亭原韻 — 창벽정 원운에 삼가 차운하다
인과 지를 읊은 시를 소리 내어 읽으니 무이산에 앉아 있는 듯하다. 학문의 연원은 끊임없이 흐르고, 창벽정 앞 물에는 가을 달빛이 비친다.
7. 謹呈野愚徐丈 政淳 以要和 二首 — 야우 서정순 어른께 삼가 올리며 화답을 구하다
풍천정 아래 물에는 밤마다 달빛이 더욱 짙다. 맑고 참된 마음이 서로 통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티 없이 환하다.
도를 닦은 이의 공부는 이미 익어 자연스럽게 그 소식이 드러난다. 나처럼 고질병이 깊은 사람에게도 그 신묘한 약 한 몫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란다.
8. 敬呈李斯文 瓛在 — 이 사문에게 삼가 드리다
세속에서 허둥대는 자취를 벗고 예로써 사양하고 양보하는 사이에 몸을 두었다. 앞길은 만 리나 멀지만 나 또한 안연을 본받아 가고자 한다.
9. 辛未洋警… — 신미년 양요 때 어재연 형제의 죽음을 듣고
장하도다, 어 중군이여. 충성과 절개가 한 집안에 빛난다. 그에게 죽음은 마치 차와 밥처럼 평범했으나 나는 그 뜻을 북두와 큰 산처럼 우러러본다. 죽어서라도 순찰하는 매서운 귀신이 되고 의로운 선비들이 다시 얼굴을 들면, 서양의 적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끝내 강토가 평정되는 날을 보리라.
10. 讀三學士傳 — 삼학사전을 읽다
차가운 옷깃을 여미고 삼학사의 상소를 읽는다. 말은 간절하고 울림은 슬프다. 그들은 《춘추》의 으뜸가는 대의를 마음에 두고 하늘과 해처럼 둘도 없는 의리를 취했다. 몸을 백 번 되살릴 수 있다면 천 년 뒤에 태어난 것이 한스럽다. 세 사람이 같은 절개를 지켜 오륜을 밝혔다. 오늘 읽는 뜻있는 선비의 뺨에도 눈물이 가득하다.
11. 辛未除夜… 二首 — 신미년 섣달그믐, 부친을 모시고 《매산집》을 읽으며
섣달그믐 한 자리에 누워도 잠들기 어려워 책을 세세히 펼쳐 본다. 일어나 남두성을 보니 별빛이 크고 밝다. 노래자처럼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며 백 년을 지내고 싶다.
푸른 등불은 밝고 흰 구름은 문을 두른다. 밤을 새우며 계절과 별자리가 바뀌는 것을 느낀다. 내 마음에도 새 뜻이 자라나니, 침상 머리의 옛 성현 경전에서 깊은 맛을 얻는다.
12. 謹呈老先生 三首 — 노선생께 삼가 올리다
동쪽 노나라의 영광 같은 선생이 계시니 우러러봄이 태산보다 높다. 하늘이 우리 도를 붙드는 뜻을 알겠고, 온갖 물줄기가 흩어져 달려가도 선생만은 참된 근원이다.
염계 주돈이를 다시 만난 듯 노래가 많다. 천 년 뒤 용문에도 그 여운이 남았다. 스승 곁의 밝고 화한 즐거움을 직접 누리니 오늘이 봄처럼 따뜻하다.
흰 구름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이 깊어지고 천 리 밖에서 문득 가을이 깊음을 깨닫는다. 집을 떠나 스승 곁에 온 참된 약효를 얻었지만 산 가득한 바람과 달을 두고 떠날 생각에는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13. 乙亥除夜 示再從弟道彦 直求 — 을해년 섣달그믐, 재종제 도언에게
나는 이미 아버지를 잃어 쓸쓸히 온갖 감회가 일어난다. 함께 시를 짓던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 목소리와 웃음은 저승과 이승으로 갈렸다. 외로운 그림자는 등불과 벽에 기대고, 빗소리는 차갑게 길을 지난다. 그 마음을 아는 네가 있으니 무엇으로 내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14. 詠爲惡 — 악행을 읊다
남이 알아볼까 두려워 겉을 온갖 방법으로 꾸민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다 해도 자기 마음의 신령한 거울은 어떻게 속이겠는가.
15. 過萬馬關有感 — 만마관을 지나며
지형의 험준함만 믿을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것이 진짜 금성철벽이다. 태평한 세상에는 병기에 피 묻힐 일이 없으니, 임금의 덕업이 이루어지기를 절하며 빈다.
16. 登般若峯 次尤菴先生金剛山韻 四首 — 반야봉에 올라 우암의 금강산 운을 차운하다
하늘 끝에서 뜬구름이 일어도 감히 산의 참모습을 가리지 못한다. 유자와 불자가 함께 우러러보는 해동의 반야봉이다.
조물주에게 묻는다. 무슨 뜻으로 이 외진 나라에 이처럼 큰 산을 두었는가. 중국의 오악이 흐려질 줄 미리 알고 이 봉우리를 따로 남겨 둔 것인가.
하늘과 한 자도 안 될 만큼 가까이 올라 옥황의 얼굴을 마주한 듯하다. 흡족한 비를 빌려 집집마다 곡식 창고가 봉우리처럼 쌓이기를 바란다.
조정의 큰 그릇으로 쓰일 듯 의젓하면서도 너그럽다. 나는 절하며 이 봉우리를 ‘장인봉’이라 부른다.
17. 詠魯仲連 — 노중련을 읊다
주나라 말 왕도의 기강이 무너지고 예의가 먼저 붕괴하자 제후들은 지략과 힘만 숭상하며 해마다 서로 침략했다. 위나라 사람 신연은 진을 황제로 받들자고 했지만, 제나라 동쪽의 선비 노중련은 호방한 절개로 이를 거부하고 차라리 동해에 몸을 던지겠다고 했다. 그 대의는 가을 서리와 얼음처럼 천 년 뒤에도 늠름하다. 이는 무엇을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천리가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공리만 서두른 사람들은 이 한결같은 이치를 잃었다.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내 마음에도 감개가 맺힌다.
18. 三憂 — 세 가지 근심
병자년 정월, 서양과 일본의 위협이 사방을 뒤흔든다는 소식을 듣고 세 가지 근심을 노래한다. 첫째는 나라와 임금을 위한 근심이다. 밤마다 꿈속에서 궁궐에 나아가 요순의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빌며, 장순·허원과 문천상 같은 충성을 다하고 싶어 한다. 둘째는 병환 중인 스승에 대한 근심이다. 나라가 위급한 때에 스승의 뜻을 받들고 찾아뵙고 싶지만 길에는 위험이 가득하다. 셋째는 일흔의 노모를 향한 근심이다. 자신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나라를 걱정하니, 자식으로서 어떻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려야 할지 애가 탄다고 한다.
19. 見龍石庵雅誦書 路中感懷 呈老先生 — 용석암의 글을 보고 길에서 느껴 선생께 올리다
다행히 나는 해동의 나라에 태어나 명나라의 의관과 문물을 이어받았다. 이 몸으로 《춘추》의 의리를 밝히고 싶다. 만 길 소나무 같은 높은 절개를 사람들이 다투어 바라본다.
20. 敬次星田卜居韻 二首 — 성전의 복거시에 삼가 차운하다
병자년에 강가 집이 처음 이루어지니 선생의 맑은 복을 우러러 기뻐한다. 도를 지키는 사람을 하늘이 완전히 가난하게 하지는 않아 수놓은 듯한 구름 산에 삶의 터를 내려 주었다.
초강의 물은 하늘보다 푸르고 전월산은 몇 만 년이나 푸르다. 옛사람처럼 축원하노니 훗날 이곳에 한 집안의 자손이 백천으로 모이기를 바란다.
21. 次玉井詩 — 옥정시에 차운하다
밭 위로 백로가 날아간 뒤 우물 속에서 다시 옥이 나왔다. 하늘이 말없이 감응하여 도운 듯 아름다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22. 贈韓晦善 — 한회선에게 주다
꽃을 보며 만나고 또 꽃을 보며 헤어진다. 삼월 봄바람이 자리 위로 분다. 관문 밖 산천 천 리가 멀어 이제부터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겠다.
23. 上伏日 憶宋士順 冕燮 — 초복날 송사순을 생각하다
늦게 맺은 인연이지만 같은 고을에 산 것이 다행이다. 요즘 보지 못한 하루가 가을처럼 길다. 두방산 앞에서 농사를 살핀 뒤에는 책 속에서 실용의 공부를 찾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24. 白雪朶… — 선사가 아끼던 백설매를 보고
선사가 사랑하던 흰 매화 한 화분이 제자에게 전해진 사연을 듣고 읊는다. 성전의 집에서 보던 꽃이 두곡의 책상 위에 놓였다. 곧은 마음은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성긴 그림자는 눈빛과 함께 밝다. 높은 선비의 덕을 닮은 꽃에 선생의 특별한 마음이 깃들었으니, 그때의 전수한 뜻을 듣고 나 또한 옷깃을 여민다.
25. 次鄭敬干 燉 韻 幷小序 — 정경간의 운에 차운하다
정경간은 스승을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떠돌고 곤궁한 때에도 후회하지 않았다. 주자의 탄신일마다 영정에 절하고 강학하던 뜻을 시로 읊은 것을 보고 같은 감회를 느껴 차운하였다.
봄꽃과 가을달은 때마다 찾아오지만 금대의 가을 잣나무를 차마 바라보기 어렵다. 온갖 흐름이 미친 듯 흩어질 때 누가 도도한 물결의 지주가 될 것인가. 어둠이 밤처럼 가득하고 올빼미 같은 소리가 난무한다. 안연·증자의 지극한 즐거움을 말로만 칭송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대의 시를 읊고 나니 해마다 이날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26. 哭宋而吾 省三 — 송이오를 곡하다
고을의 뛰어난 선비로 모두가 흠모했고, 십 년을 함께 지내며 참마음을 보았다. 어버이 곁에서는 늘 온순했고 천 리 길에도 책 상자를 지고 학문을 구했다. 그런데 어머니 상을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을 상해 세상을 떠났다. 이제 고향에 봄꽃이 피어도 시와 술을 함께할 사람이 누구인가.
27. 安丈 貞晦 見訪 — 안정회 어른이 찾아오다
지난밤 꿈속 신령한 기운이 내게 낙화를 쓸어 두라고 했다. 티 없는 흰 옥 같은 처사께서 푸른 지팡이를 짚고 서생의 문에 오셨다. 실제 공부의 단계와 선천의 근본을 묻고 싶었는데, 과연 작은 수레가 찾아오니 막혔던 생각이 눈 위 기러기 자국처럼 사라졌다.
28. 陪黃上庠 元龍 送安丈… — 황원룡과 함께 안장을 전송하며 삼소 고사를 말하다
도연명·육수정이 혜원을 전송하다 호계의 경계를 넘어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를 떠올린다. 오늘 우리도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되어 세 번 웃는다. 봄이 저무는 봉황대에 푸른 노을이 쌓인다.
29. 登鳳凰臺 — 봉황대에 오르다
봉황이 떠난 때는 아득하고 돌에는 이끼가 끼어 글자가 반쯤 가렸다. 골짜기는 스스로 기이한 형세를 갖추고 누대에서는 안개에 기대지 않아도 시야가 트인다. 옛 은자를 좇고 싶지만 이백 같은 절창을 누가 이을까. 두 물줄기와 세 산에는 꽃과 풀이 가득하고, 솔바람이 비를 몰아오니 문득 쓸쓸하다.
30. 廣寒樓 — 광한루
백 척 높이 광한루가 우뚝하고 난간에는 바람, 머리 위에는 달이 가득하다. 난간을 두른 물은 은하에서 떨어지는 듯하고 처마에 머문 구름은 옥경에 가까운 듯하다. 이곳이 신선 세계임을 알겠고 칠석의 아름다운 만남도 떠오른다. 오늘 밤 시를 쓰니 별자리도 움직이는 듯하다.
31. 至日書懷 — 동짓날 회포를 쓰다
《주역》은 ‘복괘’를 말하고 한나라 역법은 태초력을 세웠다. 한 기틀이 묘하게 움직여 사계절이 남김없이 돌아간다. 선한 마음의 싹도 이처럼 분명하지만 내 뜻과 기운이 성기니 어찌하랴. 때를 느끼며 부끄러움이 많아 종일 초가 문을 닫는다.
32. 夢筆 — 붓을 꿈꾸다
중추절 꿈에 지극한 사람이 기이한 붓을 하나 주었다. 열 갈래가 한 몸을 이룬 듯하고 크고 작은 붓끝들이 서로 짝을 이루었다. 꿈에서 깬 뒤 옛사람들의 ‘몽필’ 고사를 생각하지만, 단지 시를 잘 짓는 작은 재주로 해석하기를 경계한다. 하나의 몸에서 여러 쓰임이 나오는 모습처럼 덕을 이루고 다양한 일에 적용하는 공부를 상징한다고 받아들이며, 안연의 지혜와 자공의 식견처럼 학문의 참뜻을 알아가기를 바란다.
33. 次韻 敬題進士族祖 錘祿 聾庵故壁 — 족조 농암의 옛 벽에 삼가 쓰다
선생은 떠났지만 그윽한 집은 남아 고상한 뜻을 지금도 말해 준다. 세상 소리에 휩쓸리지 않는 ‘귀먹음’에서 안신입명의 뜻을 취했으니, 그 법도가 후학의 동산에 전해질 만하다.
34. 留題宋希菴 時一 壁上 — 송희암의 벽에 남기다
젊은 시절 용전에서 맺은 의리가 깊고 학문의 연원도 오늘날 드물 만큼 분명하다. 꽃과 달을 만나면 봄옷을 입고, 풍상 속에서는 실다운 마음을 늙도록 지킨다. 세속의 일은 바둑 보듯 높이 초연하고 남은 책을 벗 삼는다. 염계의 뜻을 직접 보았는지 무릎 꿇고 참된 요체를 묻고 싶다.
35. 和上柳訥軒 鍾九 — 유눌헌에게 화답하여 올리다
말재주만 숭상하는 세상에서 나는 사십 년을 어둡게 살아왔다. 근래 그대의 아름다운 시를 보고 서재 이름의 뜻을 생각하니 정수리를 찌르는 금침보다 낫다. 행실을 닦는 데는 민첩함이 급하고, 인을 구하는 길은 번거롭지 않다. 주인의 깊은 도를 탄복한다.
36. 渡松倉津 — 송창진을 건너다
작은 돛배가 하늘 못을 나는 듯 떠간다. 용왕이 평안하게 해 주어 회오리바람도 없다. 전날 밤 파도가 사나웠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 내 몸은 거울처럼 맑은 물 한가운데 있다.
37. 辛巳四月 作蛟龍之遊 路中口占 — 신사년 4월 교룡산 유람길에서
멀리 봉황대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산빛이 그림처럼 손가락 끝에 잡힌다. 좋은 날 함께 가자 불러 준 이웃 벗들에게 감사하며 긴 노래 한 곡 부르고 가벼운 바람을 탄다.
38. 蛟龍山吟 — 교룡산을 읊다
성 북쪽 외로운 산성이 하늘로 곧게 솟았다. 높은 곳에서는 신선 세계의 절도가 내려오는 듯하고 손바닥에는 이슬이 맺힌다. 사월의 푸른 나무 속 벗들과 세 봉우리에 올라 흰 구름 신선이 된 듯하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산에게 묻는다.
39. 次甲申韻 幷序 — 갑신운에 차운하다
한 집안에서 갑신년의 감회를 대대로 차운해 온 사연을 듣고 함께 시를 지었다. 해와 달이 흘러 다시 신년(申年)을 맞으니 왜 감회가 새로운가. 왕조의 흥망에는 일정함이 없지만 신하의 나아감과 물러남에는 의리가 있다. 중원의 오랜 오랑캐 먼지를 미워하고 동방에서 이어 온 황명에 대한 의리를 생각한다. 한 마음이 삼대에 전해졌으니 영릉의 송백을 바라보며 다시 슬퍼한다.
40. 通亭 二首 — 통정 두 수
가난한 살림에 할 일이 적은 꽃철, 네 방향이 트인 작은 정자에서 날마다 시를 읊는다. 재목이 성기고 처마도 짧지만 남북의 맑은 바람이 정신을 채우고 동서의 밝은 달이 술잔을 비춘다.
통정에 앉아 산이 벽처럼 두르고 시내가 굽어 못을 이루는 모습을 본다. 붉은 꽃과 푸른 채소, 숲 골목의 봄 즐거움을 새들도 알고 있다.
41. 偶吟 — 우연히 읊다
흙탕길 속에서는 옥도 모서리를 잃어버리듯 세상이 어지럽다. 그러나 책 속에는 별처럼 밝은 성현의 글이 있고 마음속에는 옛 성인이 세우려던 큰 그림이 있다. 봄꽃이 피고 달빛이 집집마다 비치는 가운데 글자를 물으러 오는 마을 젊은이들을 맞으니 외로운 사람에게 두 겹의 기쁨이다.
42. 丙戌二月上丁 本府校中 行鄕飮禮 — 병술년 향음례
성인의 궁장 안에서 아침저녁 성현을 만나는 듯하다. 《시경》의 사슴 노래 같은 예를 되살리려 하지만 나는 노나라 종소리를 들은 바닷새처럼 어색할까 부끄럽다. 그래도 순박한 풍속을 돌이키려는 뜻을 품는다.
43. 族姪益三 益休 書來有詩 却和 三首 — 족질 익삼의 시에 화답하다
그리움이 깊은 때 누가 한 통 편지를 보내왔는가. 가을밤 달빛 아래 다 읽고 보니 예전의 어린 아몽이 아니라 의기가 우뚝 자란 모습이 보인다.
오사카성 바닷물과 연연산 저녁 구름을 생각한다. 어느 날 창을 비껴 들고 동북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여 북과 피리 소리 속에 돌아오게 될까 하는 뜻을 노래한다.
책을 덮고 낚싯대를 들고 바닷가로 간다. 가을 생선이 맛있다 하니 하나 보내 주어 굶주린 속도 좀 위로해 주지 않겠느냐고 익살스럽게 청한다.
44. 輓黃虞侯 — 황 우후를 애도하다
충무공의 높은 공훈은 해와 달처럼 밝고 당시 절도사의 깃발이 통영성을 통솔했다. 태평한 세상이라 그대가 옛 전공을 다시 세울 기회는 없었으나 뜻있는 선비는 ‘우후’라는 이름을 들으며 공연히 슬퍼한다.
45. 和騎牛詩 — 「소를 타다」 시에 화답하다
산속에서 밭 갈고 목축하는 사람처럼 문을 닫고 숨어 경전을 읽는다. 요순과 주공의 글을 읽으며 세상에 이런 도가 없다면 누구와 벗할지를 묻는다. 노자와 허무의 학문이 뒤섞여 후세에 폐단을 남긴 것을 비판하고, 귀를 씻은 사람처럼 마음을 씻어 참된 유학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소를 타는 늙은이가 세속의 갈림길을 벗어나 성왕의 길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자신도 그 뒤를 따라 채찍을 잡고 도를 묻고 싶다고 읊는다.
46. 道中寄洪乃擧 淳翰 — 길에서 홍내거에게 부치다
눈처럼 흰 종이를 손에 가득 쥐니 양끝을 누런 끈이 감싸고 있다. 파초 잎처럼 펼치면 마음이 끝없이 이어지고, 홍애의 신선이 옛날부터 보내 온 편지처럼 느껴진다.
47. 和李丈振和 堉 — 이진화 어른에게 화답하다
영남과 호남이 막혀 만나기 어렵다. 꿈속에는 여러 영재가 얽혀 든다. 방호의 바람과 달 소식을 부지런히 물으며, 인간 세상에 또 다른 신선이 누구인지 생각한다.
48. 韓兌焉書來有詩 和送 — 한태언의 시에 화답하다
학이 깊은 못가에 우뚝 선 듯 타고난 자질이 맑고 빼어나다. 뱁새의 자잘한 지저귐을 어찌 배우겠는가. 앞날에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맑은 학 울음이 있으리라.
49. 十三君子詩 — 열세 군자에게
가뭄과 궁핍으로 죽음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열세 벗이 도움을 주어 다시 살아난 일을 읊는다. 밤낮으로 뒤척이며 은혜를 갚을 길을 생각한다. 뱀이 구슬을 물어 은혜를 갚고 물고기가 수명을 빌었다는 고사를 떠올리지만 자신은 그보다도 못하다고 자책한다. 꼬리를 흔들며 빌기도 전에 벗들이 작은 물 한 동이로 마른 물고기를 살리듯 구해 주었다. 넉넉해서가 아니라 어진 마음으로 도와준 것이 더욱 고맙다. 이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열세 군자의 수명이 산과 언덕처럼 오래기를 빈다.
50. 進士梁公行 — 양 진사를 노래하다
옛날 구양첨이 먼 서울에서 죽자 한유가 애사를 지었다는 고사를 꺼내며 양 진사의 죽음을 슬퍼한다.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교분과 고인의 문장·실행·효우를 회고한다. 처음 만났을 때 고인이 종이에 붉은 글 수십 자를 써 공부의 길을 가리켜 준 일이 정수리를 찌르는 침처럼 자신을 깨웠다고 한다. 성인의 학문은 안과 밖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이제 저승이 아득해 다시 만날 수 없음을 탄식한다.
51. 輓黃進士 七首 — 황 진사를 애도하는 일곱 수
시단의 큰 솜씨로 무리에서 뛰어났고 여러 과거 명단에 이름이 이어져 모두 놀랐다. 새 푸른 도포와 관복을 입고 한낮 궁궐에서 임금을 뵙던 모습을 떠올린다.
재주 있는 문인은 예부터 명성이 도리어 몸을 그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반 이랑 남짓한 집에서 연꽃처럼 홀로 맑게 선 그의 삶을 보라고 한다.
《초사》를 수없이 읽던 그의 깊은 맛은 속인과 나눌 수 없었다. 후세에 양웅 같은 이가 알아줄지는 모르나 가슴속 비분과 감개는 온전히 남아 있다.
봉황대 늙은 소나무 그늘에서 둥근 부채로 더위를 식히며 몇 번이나 지팡이를 따라 함께 놀았는지, 서로 바라보다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현포 서쪽에 거처를 잡고 가뭄에도 가을 벼가 들판에 가득했다. 한 시내의 바람과 달이 더욱 맑아 새 시의 격조를 높였다.
병이 들어 시 짓기 어려워지며 세월이 갑자기 흘렀다. 이제 돌아보니 모두 꿈이 되었고 남산에는 다시 푸른 풀이 돋았다.
빈 집에 하룻밤 가을바람이 불고 구름 같은 조객이 흰 버들을 보며 운다. 붓끝의 기이한 기운은 묻어 버릴 수 없으니 옥루에서도 큰 문장을 지으리라.
52. 次鳳鳴齋韻 — 봉명재 운에 차운하다
맑은 기운이 동쪽 대지를 떠받치고 봉우리들이 춤추듯 어울린다. 띠집은 새로 단장되어 소나무처럼 무성하고 잣나무 그림자가 대숲 사이로 어른거린다. 북쪽으로 삼각산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여러 산봉우리가 통한다. 봉황의 울음 같은 상서로운 소리를 듣는 태평한 때, 우리 임금의 덕업이 융성함을 기뻐한다.
53. 鄭倫寬 琯鉉 意外歸覲 — 정윤관이 뜻밖에 귀향하자
마음 공부의 법을 천천히 말하며 두 해를 함께했으나 백 년의 인연을 기약했다. 먼지 없는 책상에서 먹을 갈고 눈 내린 차가운 창가에서 등불을 함께 밝혔다. 접착제가 천 길을 붙이는 것처럼 뜻을 굳게 지키는 일은 가능하지만, 큰불을 한 잔 물로 끄기는 어렵다. 왜 그리 급히 떠나는지 묻자 흰 구름이 예부터 지금까지의 부모 생각을 일으킨다.
54. 蛟龍山 — 교룡산
외로운 산성의 아름다운 경치가 사람을 부른다. 평야와 읍내 누각까지 시야가 끝없이 열린다. 불전과 장대에는 한가한 세월이 흐르고 바위꽃과 시냇가 나무에는 저절로 봄가을이 간다. 이 속에서 인자와 지자의 즐거움을 안다면 곁사람은 단순한 시인의 유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55. 松廣寺講會席上韻 — 송광사 강회 자리에서
조계산에서 잠을 깨니 해가 이미 동쪽에 올랐다. 네 고을의 선비들이 한 누각에 모였다. 젊은 날 함께 공부하자는 약속을 지키는 그대들을 보며 믿음이 더해지고, 나는 점점 책 공부가 성기어짐을 부끄러워한다. 골짜기 물소리는 밤비에 커지고 천 숲의 꽃향기는 하늘 바람에 짙다. 이 유람을 한갓 놀이와 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
56. 春分日華嚴寺 看老人星 — 춘분날 화엄사에서 노인성을 보다
화엄사를 찾아온 것도 늦었고 내가 방장산에 드나든 지도 이미 여러 해다. 붉은 연꽃은 여전히 형상을 드러내고 푸른 물은 끝없이 흐른다. 남극을 향한 누대에서 노인성을 바라보고, 서쪽 봉우리를 마주한 문에서 달과 함께 잠든다. 구름 밖에 청학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신선처럼 훌쩍 날아오르고 싶다.
57. 丁公藤杖 — 정공등 지팡이
지리산의 신령한 덩굴로 만든 지팡이를 얻고 수많은 신선 고사와 약초 전설을 끌어와 길게 노래한다. 정공등은 남향 비탈에서 자라고 오래된 의서에서는 노쇠를 보하고 허리와 무릎을 강하게 한다고 전한다. 시인은 서복·오강·안우산 등의 고사를 이어 붙이며 이 지팡이가 단순히 늙은 몸을 받치는 도구를 넘어, 성현의 도를 따르는 사람의 ‘험한 길을 붙들어 주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진짜 어려운 것은 지팡이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사람 마음과 세도의 어둠이라며, 신령한 지팡이를 두고도 아무 능력이 없는 자신을 탄식한다.
58. 再得丁公藤 金秀才琪潾所贈 — 정공등을 다시 얻다
신령한 산의 비와 이슬을 몇 번의 봄 동안 받았는가. 옥 같은 나무가 빼어나게 자라 무리보다 뛰어나다. 만나자 웃으며 금란지교를 맺으니 높은 풍모를 힘껏 도와주는 옛 벗 하나를 얻은 듯하다.
59. 代靑藜下怨語二絶 — 청려장을 대신해 원망하다
빈 산의 초목으로 헛되이 세월만 먹었으니 죽도록 적막하여 누가 이름을 전해 주겠는가. 오래 산다는 효험만을 정공등에게 기대는 것은 미혹이다. 옛부터 향기를 남긴 것은 오직 어진 이를 본받은 사람이다.
천록각 화재 때부터 선비들이 내 도움을 입었다고 청려장이 자랑한다. 그런데 오늘 봉황대의 차가운 달빛 아래서는 버림받은 아내처럼 제 신세를 한탄한다.
60. 慰靑藜 — 청려장을 위로하다
농부는 밭을 탐하고 장사꾼은 돈을 탐하듯 사람마다 익힌 솜씨가 다르다. 내가 무정해서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전부터 네 효용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네 쓰임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형제처럼 친하고 현인처럼 공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가슴속에는 한 글자도 들어갈 자리가 없고 가난한 집에는 벌써 저녁이 깊었다.
61. 三加日 示大休 — 관례 날 대휴에게 보이다
떠도는 삶을 이어 오다 고향 땅에서 아들의 관례를 치르니 감회가 깊다. 전해 온 옛 학문은 한 삼태기씩 쌓아 산을 이루듯 해야 하고, 새로 받는 복은 샘물이 흘러 강이 되듯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활과 화살을 차는 성인의 책임을 생각하고 집안의 대들보가 되어 향기를 전하라. 밤낮으로 이 뜻을 잊지 않는다면 객지의 온갖 시름을 너로 인해 잊겠다.
62. 拜柳侍中 升茂 墓 — 유승무 시중의 묘에 절하다
유 상공의 맑은 풍모는 백세를 씻어 주고 탐욕한 이를 청렴하게, 나약한 이를 굳세게 한다. 선영의 땅에서 일찍 큰 인물이 나와 고려 때 현업을 빛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성묘를 오늘 이루고, 누가 비석 머리에 연릉 계찰과 같은 추모의 글을 새길지 생각한다.
63. 見張遜卿 鎭學 韻 却和之 七首 — 장진학의 시를 보고 일곱 수로 화답하다
문을 닫아 손님맞이를 끊고 산이 비어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춘추》를 공부하여 길이 공자의 신하가 되겠다.
이제부터 술 마시는 법이나 배워 유령에게 술의 덕을 묻고, 종일 거나하게 잠들어 득실로 정신을 괴롭히지 말까 한다.
사람들이 내게 예전과 달라진 솜씨가 무엇인지 묻는다. 정자에는 옛 풍경 그대로 밤마다 달 한 바퀴가 뜰 뿐이다.
고개 숙여 한숨을 쉬지만 속마음을 어찌 다 펼칠까. 천지가 넓다 해도 일곱 자 몸 하나 둘 곳이 어렵다.
노중련이 떠난 뒤 탁월한 자취는 오래전 일이 되었다. 동해에 몸 던질 곳조차 없으니 그 영혼만 그리워한다.
하늘을 가린 구름은 검고 비와 바람이 잇따른다. 오래 가난하게 살다 보니 해가 다 가도록 제대로 쓸 두건도 없음을 스스로 웃는다.
장생은 옛 도에 뜻을 두어 젊은 기운이 따뜻하다. 깊은 옷소매에서 시축을 꺼내 일곱 수의 맑고 새로운 시를 토해 냈다.
64. 漾碧亭 — 양벽정
벽에는 세 현인의 이름이 있고 배에는 두 선비가 앉았다. 밤이 오자 강물 위 달이 옛사람과 오늘 사람을 똑같이 비춘다.
65. 和金伯朱 在煕 舟字詩 — 김재희의 ‘주(舟)’자 시에 화답하다
예나 지금이나 물은 도도히 흐르고 천지 사이 사람은 한 잎 배와 같다. 나루를 물을 바른 길은 있고 노 젓는 노래의 묘한 소리가 남는다. 하늘 가득한 달을 배에 싣고 만 리 바람에 맡겨 간다. 그대를 보내며 건너갈 곳을 삼가라고 당부한다. 급한 물결은 아래로 흐르기 쉽다.
66. 梅花 — 매화
집 동쪽 밭가에 외로운 매화 한 그루가 서 있다. 봄비가 밤새 지나자 만 점 꽃이 피었다. 주인 마음에 슬픔이 있는 줄 모르는지 맑은 향기는 예전처럼 문 안으로 들어온다.
67. 梅花答 — 매화가 답하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그대를 더 잘 아는 것이 누구겠는가. 형제간 즐거움을 볼 때마다 그대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연못 가득 푸른 풀이 어느새 꿈이 되었으니, 나는 일부러 보슬비 속에 눈물을 띠고 찾아왔다.
68. 謝梅花 — 매화에게 사과하다
육안뿐인 농산이 너 매화를 저버렸다. 시주머니를 한 번도 너를 위해 열지 않았다. 십 년을 함께하고도 처음 보는 얼굴처럼 대했으니 헛되이 네 향기로운 넋만 오가게 했다.
69. 梅花答 — 매화가 답하다
옛부터 시인들은 매화를 즐겨 읊어 향기로운 시구가 가지마다 꽃핀 듯했다. 그런데 그대는 붓이 있어도 모두 다른 곳에만 달리니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많아진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70. 謝梅花 — 다시 매화에게
담박한 생애로 사는 나도 매화와 비슷하다. 봄바람 속에 서로의 냄새를 늦게야 알아보았다. 달 지고 별 기우는 새벽에 꼿꼿이 서 있는 너를 보니 강호의 막역한 벗이 마음속으로 찾아온다.
71. 梅花答 — 매화가 답하다
열매는 버리고 꽃만 탐하는 것은 속된 사람이 보는 매화다. 바라건대 그대는 꽃이 핀 뒤 반드시 열매를 맺어라. 언젠가 은나라 솥에서 매실로 국 맛을 조절하던 고사처럼 세상에 쓰일 날이 오면 사신 수레가 멀지 않아 찾아오리라.
72. 偶吟呈諸君 三首 — 우연히 읊어 여러 벗에게
천하가 밤이 되려 해 태양빛이 희미하다. 하늘 뜻이 아득하지만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대들과 함께 해가 지는 우연의 못으로 들어가 금빛 해를 받쳐 올려 다시 세상에 빛내고 싶다.
이 공부는 어렵지 않으면서 또한 쉽지 않다. 천리와 인욕이라는 두 갈래 길이 열린다. 마음을 가라앉혀 스스로 방향을 얻으면 여러 경전이 해처럼 환하게 길을 비춘다.
길은 만 리나 멀고 짐은 천 근이나 무겁다. 백 년 인생도 문틈 사이를 지나가는 말처럼 빠르다. 몸을 이끌고 가다 중도에서 멈춘 수레바퀴 자국을 밟지 말고 한 치 한 분의 시간도 아껴라.
73. 入山翌日 答黃兄卓汝 瑬 — 입산 이튿날 황탁여에게 답하다
방호산에 한 번 들어오니 꿈조차 기이하다. 신령한 풀이 곳곳에 있어 굶주림도 잊는다. 흐르는 물과 뜬구름을 실컷 보고 돌아와 술을 마시고 다시 시를 쓴다.
74. 路中憶房百行 孝源 韻次之 — 길에서 방효원을 생각하며
봄새 소리 속에 보리가 익을 때가 가까워지고 좋은 봄빛은 곳곳에서 사람을 붙들어 둔다. 먼 앞날 생각 없는 이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즐거움을 만나자마자 근심을 잊고 만다.
75. 尹平叔…課歲相顧 — 여러 벗이 연말에 찾아와
이틀만 지나면 새해다. 한 해를 보내기도 어려웠는데 또 한 해가 그러하다. 먼길에 어찌 흰 눈을 헤치고 찾아왔는가. 참된 공부의 차례를 깊은 못처럼 이야기한다. 술독이 빈 것이 부끄럽지만 마주 앉아 여러 일을 전한다. 흥이 나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가고 싶으니 복사꽃이 다 붉어져 물 위에 하늘이 뜨는 때를 그린다.
76. 次諸益韻咏懷 — 여러 벗의 운에 차운하여 회포를 읊다
문을 닫으면 밖의 흐림과 맑음을 말하지 않는다. 때때로 찾아오는 벗들이 고요한 삶을 흔든다. 숲 아래에서는 주희를 뒤따르는 사람이 있지만 세상에는 황명의 의리를 논할 곳이 없다. 산골 구름은 여전히 그윽하고 뜰의 나무는 자라 늦은 소리를 들려준다. 시 짓는 병으로 종일 흰머리를 어루만지며 젊음이 참으로 좋은 정신의 때였음을 느낀다.
77. 樹木二十三韻 贈族姪柏休 — 나무 스물세 운, 족질 백휴에게
집안의 계보와 선조들을 한 그루 큰 나무에 비유한 장편이다. 고려 말 고령에 뿌리내린 시조부터 문을 닫고 절의를 지킨 선조,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이들, 벼슬길에서 간언한 후손들까지 가지가 뻗듯 이어진 가문의 역사를 노래한다. 특히 높은 벼슬과 과거 급제 자체보다 세상이 어두울 때 절의를 지키고, 태평한 때 충직하게 간언하며, 때가 되면 용감하게 물러난 것을 ‘세한에도 변하지 않는 나무’의 덕으로 본다. 끝에서는 자신은 그 나무를 그려낼 화공도 치료할 의원도 아니라며, 찬바람에 낙엽 지는 현실 앞에서 후손에게 뿌리를 지키라고 당부한다.
78. 銀杏爲火所焚嘆 — 은행나무가 불타 탄식하다
죽곡에 십칠 년 머물며 마을 앞 천 년 은행나무를 늘 공경해 왔다. 비바람과 우레에도 끄떡없던 큰 나무가 어느 날 불에 타자 마을 노인들이 달려와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늘과 열매가 모두 옛일이 되고 마을 풍경이 쓸쓸해졌다. 시인은 작은 나무의 재난에서도 나라와 세상의 큰 흥망을 떠올린다. 사소한 놀이와 방심이 끝내 나라의 화로 번질 수 있음을 옛 송나라 고사에 빗대며, 벗의 조문을 받은 뒤 술 취해 이 시를 쓴다.
79. 薰臍 — 배꼽 뜸
높은 산에서 난 쑥잎에는 신묘한 효험이 있다고 하여 소금과 재료를 마련해 배꼽에 뜸을 뜬다. 찾아온 손님은 밥도 잘 먹고 얼굴빛도 같은데 왜 번거로운 치료를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겉몸은 멀쩡해도 기혈이 충실하지 않고 사방에는 외사가 오랑캐처럼 둘러싸였으니,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리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답한다. 기해혈을 잘 보양하면 뿌리를 굳게 할 수 있다는 옛 학자의 말을 믿어 미리 몸을 다스리는 뜻을 읊는다.
80. 次黃正宥 炳中 韻 — 황정유의 운에 차운하다
바닷가 고향 소식이 산기슭까지 이르렀다. 답장을 쓰려다 붓을 멈추고 하늘만 본다. 세상의 치란을 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음속 맑고 흐림은 강물에 맡긴다. 붉은 매화와 봄은 또 지나가고 단약을 굽는 불은 몇 해나 이어질까. 방호산 가랑비 뒤 서로 바삐 길을 떠나던 모습을 떠올린다.
81. 送尹光馨 厚善 — 윤광형을 보내며
책상에 기대 고개 숙여 《서경》의 ‘서리’ 같은 망국의 슬픔을 운다. 국화술이 익어 취할 때가 되었지만 큰 뜻은 허망해지고 뜰의 나무를 마주해서 잠시 마음을 달랜다. 바람 부는 길에는 사람이 없고 한 등불 아래 그대와 밤을 오래 보낸다. 형이 내 가난한 집 사정을 묻거든 그저 이 소탈하고 미친 사람의 모습을 대강 전해 달라.
82. 同趙君習…入方丈山 — 젊은 벗들과 방장산에 들다
낙화와 흐르는 물의 강남 같은 봄날, 두 젊은 벗과 함께 간다. 신선 세계를 바다 밖에서 찾을 필요 없이 기이한 유람은 봉성 곁에 있다. 최치원의 문장은 떠나고 푸른 산만 오래되었고, 남명 같은 처사가 다시 온 듯 흰 학이 잠든다. 안개와 노을을 손에 잡은 듯 웃지만 사흘 동안 시주머니는 아직 비어 있다.
83. 洗耳嵒 — 세이암
세이암 곁에서 나도 귀를 씻는다. 고운 최치원의 이런 뜻이 내 스승이다. 물가에서 이름을 바위에 새기는 사람을 보며 웃는다. 허유의 벗 소부는 어찌 후세의 이름을 구했겠는가.
84. 白雲山 — 백운산
동국에는 이름난 산이 많고 남쪽 하늘에는 또 백운산이 있다. 사월에 처음 찾아와 천 년 만에 그대를 처음 알게 된 듯하다. 서로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아 해가 질 때까지 빈 절문에 앉아 있다.
85. 海橋鄭氏書室 — 해교 정씨 서실
저녁에 다리 위 집을 찾아왔다. 내 거친 노래가 어찌 그대의 서실에 남길 만하겠는가. 새옹의 말과 교인의 물고기 고사를 떠올리며 세상 득실을 웃는다. 땅에는 푸른 산이 가득하고 하늘에 뜬 바다는 끝이 없다. 만 리 바람을 타고 허둥대던 사람은 이제야 도연명이 자기 초가를 사랑한 뜻을 알겠다.
86. 山行 — 산길
나쁜 안개가 하늘을 이어 검게 덮고 한낮에도 해가 희미하다. 그러나 두 눈은 촛불처럼 밝으니 걸어가는 길을 잃지 않는다.
87. 和申希仁 鉉濟 — 신희인에게 화답하다
겉으로 환한 것과 속으로 은은히 빛나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대장부가 비로소 어진 사람이 된다. 꽃 가득한 숲의 봄도 늙어 가고 한 침상에서 풍우를 들으며 잠 못 이룬다. 그대 집안의 전통을 욕되게 하지 말고, 자하가 말한 유자의 길처럼 성문에 이르는 몇 마디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라고 권한다.
88. 外舍落成日 書懷呈諸勝友求和 — 외사가 완공된 날
평생 바라던 큰 집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듯 기쁘다. 천하의 선비들을 모두 불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다. 앞사람이 남긴 도서와 태고의 거문고 노래를 가까이 두었다. 큰 계획은 물처럼 흘러가 버렸지만 작은 거처는 산속에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첫 모임에서 ‘명(明)과 성(誠)’의 뜻을 읊으며 벗들에게 화답을 구한다.
89. 雲峯碑殿 — 운봉 비전
오래된 나무는 하늘을 찌르고 맑은 냇물은 땅 가득 흐른다. 흰 심의를 입고 찾아오니 해 질 무렵 뜻이 아득하고 깊다.
90. 琴五首寄房百行 — 방백행에게 거문고 다섯 수를 보내다
벗이 칠현금을 잘 꾸며 보내 주었다. 고산유수처럼 마음을 알아주는 뜻이 담겼지만 먼지 묻은 나는 삼 년 동안 벽에 걸어 두고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술이 있으면 책을 멈추고 거문고를 오래 바라본다. 옛 악보를 빌려 보아도 마음만 많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속절없이 지나가니 사람들은 농산이 음악을 모른다고 말한다.
상중의 흰 관을 쓴 몸으로 검은 거문고를 타는 것이 맞겠는가. 마음의 경계를 쇠문처럼 굳게 지켜 남이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조용히 남은 소리를 찾을 곳도 없다.
세상이 나를 쓰지 않는 것은 내가 거문고를 쓰지 않는 것과 같다. 몇 해를 서로 두고 지내며 둘 다 마음에 걸렸다. 달 밝고 긴 밤 초당이 고요해도 보배 상자에는 만고의 소리가 감추어져 있다.
후세의 차갑고 맑은 소리만으로 어찌 참된 거문고라 하겠는가. 숲과 들에 살며 마음이 상할 때 생각은 요임금의 조정으로 날아간다. 위아래가 화목하여 모두 좋은 소리를 내던 세상을 그린다.
91. 外舍諸君共作惜別詩… — 외사의 여러 제자와 이별하며
벗들이 책 상자를 메고 멀리 찾아와 석 달 동안 공부에 빠져 고기 맛도 잊었다. 흰 물속에 숨은 진주 같은 인재들을 아끼면서도, 자신은 쓸모없는 나무처럼 청산에 묻혀 있음을 부끄러워한다. 나라를 걱정하면 늘 요순 시대로 돌아가기를 빌고, 학문을 논하면 낙양과 건양의 정통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별자리 삼과 상처럼 서로 멀어질 이별이 참으로 아쉽고 달 아래 홀로 남을 밤이 견디기 어렵다.
92. 四十九歲戊戌 次李白尋陽紫極宮感秋詩 — 마흔아홉 살에 이백의 시에 차운하다
이백 같은 천재도 마흔아홉에 지난날을 후회했다. 그 진실한 말이 손에 잡힐 듯하다. 천 년 사이에 나이 오십에 허물을 알았던 거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흰 이슬이 서리가 되는 밤 잠들지 못하며 공문 삼천 제자를 생각한다. 자공과 자하 같은 이들조차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주역》에서 길을 잃고도 돌아오는 ‘복’을 점치듯, 옛 거울을 닦으며 앞 수레가 뒤집힌 일을 잊지 않고 맑은 창 아래 육경을 숙독하고자 한다.
93. 寄柳源汝 根善 — 유원여에게 부치다
깊은 밤 초당에서 거문고 소리가 난다. 그 곡 안의 마음을 누가 알까. 산과 바다가 흔들리고 별까지 움직이는 듯한 어지러운 세상이다. 옛 요순의 정치가 가능했던 까닭을 다시 묻는다. 우·직과 안연은 처지가 달라도 같은 도를 지켰다. 세상이 근본에서 어긋나면 흐름 전체가 달라진다. 《춘추》의 대일통을 언제 제대로 읽을까 생각하면 공자가 기린을 보고 울었다는 때처럼 눈물이 난다. 그 울림이 그대 유군을 불러오기를 바라며, 새로 장정한 주자의 글을 방 가득 두고 함께 힘써 읽자고 청한다.
94. 宋君義集 敬淑 自華陽洞歸… 三首 — 송경숙이 화양동에서 숭정 어필을 가져와 준 데 감사하다
옛 명나라의 찬란한 봄은 삼백 년 전 일이 되고 붉고 누런 빛은 쓸쓸한 연기 속에 잠겼다. 그래도 한 조각 밝은 달 같은 어필에는 변치 않는 빛이 있어 한밤중에도 성현의 근원을 찾게 한다.
화양동의 하늘에서 돌아온 일이 우연이 아니다. 신묘한 필적은 조화에 참여한 듯하고, 만세의 사람들은 한결같은 절의를 말하리라.
책상에는 《춘추》가 있고 손에는 용천검을 잡은 듯하다. 중원을 생각하면 오장이 탄다. 그대를 만나 다시 ‘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나무는 짙푸르고 풀은 저절로 무성할 뿐이다.
95. 贈或人 八首 — 어떤 이에게 주다
어제는 갖옷을 입고 눈길을 갔는데 어느새 봄꽃이 성에 가득하다. 바다에 이른 큰 물결은 거슬러 돌아가기 어려우니 황급히 흐르는 세월이 너무 무정하다.
나도 젊은 날 책 상자를 메고 길을 떠날 때에는 남보다 앞서려는 기상이 성처럼 높았다. 그러나 만사가 허사가 되고 흰머리만 늘어 속이 탄다.
그대가 이른 새벽 수레를 몰아 멀리 떠나는 것을 본다. 집 안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고 이름난 꽃을 비단 위에 더하려는 듯하니, 서로 아끼고 돕는 것도 인간의 상정이다.
문밖에는 길이 종횡으로 뻗어 있는데 한 채찍으로 마땅히 서울을 향해야 한다. 그런데 밝은 대낮 갈림길에서 어찌 미혹하는가. 완적이 갈림길에서 통곡했다는 심정을 알겠다.
가장 아까운 것은 길 절반에서 걸음을 멈추는 일이다. 태괘에도 성벽이 무너질 경계가 있다. 시장 한복판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뜻을 잃는 부끄러움이 크다는 옛 고사의 뜻을 새긴다.
《대학》의 삼강령과 팔조목을 행실의 기강으로 삼아, 노나라에서 전해 온 성학의 자취를 한 걸음씩 밟는다면 평생 처음 세운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는 태행산 아래를 걷고 저녁에는 먼 백제성에 묵는다고 해도 만 리 주유를 멀다 하지 않는다. 봉황이 날고 용이 뛰듯 큰 뜻은 모두 마음가짐에 달렸다.
깊은 못 위 외나무다리를 지나듯 끝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마음의 성을 지켜라. 삼백 예와 삼천 위의를 하나같이 따르면 밝게 드러나는 천리가 곧 사람의 참된 정이다.
권1 검수 메모
- 시어와 전고가 매우 밀집된 작품, 특히 **〈三憂〉, 〈和騎牛詩〉, 〈進士梁公行〉, 〈丁公藤杖〉, 〈樹木二十三韻〉**은 2차 교감 대상으로 표시한다.
- 원문에 이체자·결자(▣)·후대 전사 흔적이 있어 인명 및 일부 고유명사는 확정하지 않았다.
- ‘현대어 번역’은 우선 전체 의미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초벌본이며, 후속 단계에서 행별 직역과 주석을 추가한다.